고백부터 해야겠다. 나 역시 보고서를 만들어내는 사람이다
용역 사업을 수주하고, 현장을 조사하고, 분석하고, 제안서를 썼다
보고서들이 책꽂이에 꽂힌 채 잊혀지는 것이 일상이었다. 처음엔 몰랐다. 내가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
실패가 가르쳐줬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실패를 되짚고, 국내외 사례를 뒤지고, 실시간 데이터들을 분석하며, 현장의 실제 플레이어들과 수없이 대화하면서 조금씩 방향이 보이기 시작했다
알고 나니 오히려 더 무거워졌다. 보이지 않을 때는 모르니까 솔직히 편했다
'남는 게 없는 사업들'
지역 관광개발 현장에 가면 반복되는 장면이 있다. 회의실 화이트보드를 가득 채운 WBS라 불리는 일정표, 화려한 슬라이드, 자신감 넘치는 발표. 그런데 사업이 끝나고 나면 남는 게 없다
원인은 하나로 모인다. 사람을 심지 않은 것이다. 콘텐츠를 만들기 전에, 예산을 쓰기 전에, 관광객을 부르기 전에 그 지역에서 관광을 꿈꾸며 버텨줄 사람이 없었다
'3년이라는 최소한의 시간'
지역 관광의 체질을 바꾸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1~2년 안에 성과를 내겠다는 계획은, 처음부터 실패를 예약한 것이다. 최소 3년이다
첫해는 신뢰를 쌓는 해다. 낯선 사람이 마을에 들어오면 지역 사람들은 쉽게 마음을 열지 않는다. 당연한 일이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이들이 왔다가 사라졌는가
두 번째 해는 함께 시도하는 해다. 작은 실험, 작은 실패, 작은 성공이 쌓인다
세 번째 해가 되어서야 비로소 뿌리가 생긴다
그 뿌리가 없으면 어떤 콘텐츠도 이식되지 않는다. 사막에 꽃을 심는 격이다
'마중물의 역할, 그리고 오해'
혼자서는 시작하기 어렵다. 마중물이 필요하다. 지역에서 만든 콘텐츠를 바로 시장에 내다 파는 역량은 처음부터 갖추기 어렵다. 외부의 자원과 네트워크가 그 간극을 채워줄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자주 오해가 생긴다. 마중물을 주인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마중물은 펌프를 작동시키는 물이다. 진짜 물은 땅속에 있다. 마중물이 물을 퍼 올리고 나면, 역할은 끝이다. 주인 행세를 하면 펌프가 망가진다
'커뮤니티, 순서가 있다'
"위험한 것은 인구감소가 아니라 상호작용의 감소다. 연결이 끊어지고, 역할이 약해지고, 공동체가 파편화될 때 사회 생태계는 붕괴한다." 데이비드 브룩스의 말이며 종종 되뇌는 말이다
관광의 핵심은 '커뮤니티'다. 사람이 모여야 하는 것이 관광의 본질이다
어디서부터 출발해야 하나? 당연히 지역에서 지역 사람들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지역 내부에서 먼저 연결이 만들어지고, 인근 지역으로, 대도시로, 더 넓은 곳으로 퍼져나가야 한다
이 순서를 무시하고 실적부터 내려 하면, 지역 사람들은 구경꾼이 된다
내 동네 일인데 남의 잔치가 되는 것이다. 명심 또 명심해야 한다
'설득, 설득, 그리고 또 설득'
방향이 보인다고 해서 길이 열리는 건 아니다. 실행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행정을 설득해야 한다. 성과 지표가 다른 공무원들에게, 1년이면 다른 보직으로 발령나는 공문원들에게 3년을 기다리자고 설득해야 한다
주민을 설득해야 한다. 여러 번 실망한 사람들에게 이번엔 다르다고, 다시 한번 믿어달라고 말해야 한다
유통과 판매를 쥔 플레이어들을 설득해야 한다. 아직 증명되지 않은 지역 콘텐츠에 손을 내밀어달라고 부탁해야 한다
직원 마저도 설득해야 한다. 못난 대표를 믿어 달라고
설득, 설득, 또 설득이다. 그 과정에서 실행의 책임은 고스란히 어깨에 얹힌다. 잘못되면 내 이름이 남는다
그래서 자다가도 벌떡 깨는 밤이 있다. 이 방향이 맞는가? 내가 설득한 사람들을 실망시키지는 않을까? 신념 없이는 감히 버틸 수 없는 일이다. 확신이 아니라 신념이다. 확신은 결과를 알고 나서 생기지만, 신념은 결과를 모르면서도 걷는 힘이다
외롭고 두렵다. 술 땡기는 밤들의 연속이다. 발주처는 모른다, 아니다, 광주껏들, 남해껏들, 목포껏들, 홍성껏들, 용역에 이골이 난 이들은 알더라. 술 한잔의 위로를. 본인들도... 외롭거든
'그래도 심어야 한다'
지역관광은 관광객을 데려오는 일이 아니다. 그 지역에서 관광의 주인이 될 사람을 키우는 일이다
공공이 씨앗을 심고, 민간이 뿌리를 내리고, 학계가 방향을 잡고, 지역사회가 열매를 거두는 거버넌스. 이 구조가 답이다
나는 아직 설득 중이다. 행정도, 주민도, 시장도, 가끔은 나 자신도. 그래도 심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뿌리가 내리는 데 시간이 걸릴 뿐, 심지 않으면 아무것도 자라지 않으니까